한글 이야기

어휘 속에 담긴 시간 감각 — 옛날 시간 표현과 단위들

온테라 2025. 4. 5. 15:00

해시, 삼경, 하루살이… 옛말 속 시간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느림과 여유가 있던 삶이 보입니다.

 

 

한글 속 시간에도 온기가 있었던 시절

오늘날 우리는 시간을 초 단위로 재고, 분 단위로 일정을 쪼개며 살아갑니다. 스마트폰 시계에 종속된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조상들은 해의 움직임과 계절의 흐름을 따라 시간을 느꼈습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 속에는 지금은 낯선 말들인 ‘삼경’, ‘해시’, ‘순’ 등이 자연스럽게 쓰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글 속에 녹아 있는 옛 시간 표현과 단위들을 되짚어 보며, 숫자 대신 감각으로 시간을 재던 시절의 따뜻한 리듬을 함께 되살려 보고자 합니다.

 

 

한글로 해를 따라 나누던 하루 — ‘해시’, ‘인시’, ‘묘시’

조선시대까지 사용되던 ‘12시(十二時)’ 체계는 하루를 2시간 단위로 나누어 각 시각마다 동물 이름을 붙였습니다.
‘자시(밤 11시~1시)’, ‘축시(1시~3시)’, ‘인시(3시5시)’, ‘묘시(5시7시)’

이처럼 나뉘어진 시간 표현은 단순한 시간 개념을 넘어서 생활 속 감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시’에는 닭이 울기 시작하고, ‘묘시’에는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변화를 몸으로 느끼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해시(亥時)’는 밤 9시부터 11시 사이로, 요즘으로 치면 잠자리에 드는 시간입니다.
이처럼 한글 시간 표현은 숫자가 아닌 자연의 흐름을 말로 담아낸 방식이었습니다.

 

어휘 속에 담긴 시간 감각 — 옛날 시간 표현과 단위들

한글이 나눈 밤의 단위 — ‘삼경’, ‘사경’, ‘자정’

밤은 다섯 등분으로 나뉘어 ‘초경’, ‘이경’, ‘삼경’, ‘사경’, ‘오경’이라 불렸습니다. 이 표현은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리던 ‘경(更)’ 체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초경: 저녁 7시~9시
  • 이경: 9시~11시
  • 삼경: 11시~1시 (가장 깊은 밤)
  • 사경: 1시~3시
  • 오경: 3시~5시

‘삼경’은 시조나 한시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밤의 고요함과 정서를 상징합니다.
또한 ‘자정(子正)’은 밤 12시, 자시의 정중앙으로, 지금의 ‘00:00’을 의미합니다.
한글 속 옛 시간 단위는 수치보다 리듬을 중시하던 감각의 언어였으며, 그 속에서 사람들은 북소리를 따라 하루를 마무리하고 시작했습니다.

 

 

짧은 시간에도 한글의 정서가 담겨 있었습니다 — ‘순’, ‘사리’, ‘반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분’, ‘초’는 사실 한자어입니다.
하지만 한글에는 **‘순’, ‘찰나’, ‘사리’, ‘반날’**과 같은 말로 시간을 표현하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 : 아주 짧은 시간
  • 찰나: 눈 깜짝할 정도의 순간
  • 사리: 반나절보다 약간 짧은 시간
  • 반날: 하루의 절반 정도 시간

이런 단어들은 정확히 몇 분, 몇 초인지 알 수 없어도 체감적으로 충분히 전달되었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공유되던 시간 개념이었습니다.
‘하루살이’라는 말도 “하루만 살다 사라지는 짧은 생명”이라는 정서적 시간 인식이 반영된 예이며, “해 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같은 말은 시간보다 감각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표현이었습니다.
한글은 시간을 나누기보다, 함께 느끼는 방식으로 소통했습니다.

 

 

숫자보다 마음으로 시간을 재던 한글의 시대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며 우리는 더 빠르고 효율적인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와 함께 한글 속 시간의 여유와 정서는 잊히고 말았습니다.
과거에는 ‘해시쯤 되었겠구나’, ‘삼경이라 자야겠어’라고 말하며 시간을 감정과 함께 공유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쉼, 감각, 정서가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00:00’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면, 옛사람들은 북소리를 듣고 자정의 고요함을 느꼈습니다.
한글 속 옛 시간 표현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단지 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리듬과 감정을 다시 불러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잊힌 어휘 하나가 지금의 삶에 여백을 만들고, 말 한마디가 마음의 시계를 천천히 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