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이야기

시간을 재는 또 다른 단위, '밤 한정', '이레', '달포'의 진짜 의미

온테라 2025. 4. 8. 21:00

– 숫자보다 정서를 재던 옛날의 시간법 –

 

 

숫자 없이 시간을 표현하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시간을 분, 시간, 일, 주, 월, 년 단위로 세분화해 측정합니다. 그러나 옛날 한국 사람들은 훨씬 더 정서적이고 체감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표현했습니다. 하루를 ‘해 뜰 무렵’, ‘점심 무렵’, ‘달이 떴을 때’처럼 설명하거나, 계절을 ‘꽃 피는 때’, ‘김장 담글 철’이라고 부르는 감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인식은 한글 표현 속에도 스며들어 ‘이레’, ‘달포’, ‘반달’, ‘밤 한정’ 같은 독특한 단위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특히 ‘이레’, ‘달포’, ‘밤 한정’이라는 세 가지 단어를 중심으로, 한글이 담아낸 시간의 감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간을 재는 또 다른 단위, '밤 한정', '이레', '달포'의 진짜 의미

‘이레’ — 일주일이라는 말보다 부드러운 우리말

‘이레’는 오늘날 ‘일주일’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입니다. 숫자 ‘7일’보다는 흐름의 감각이 강조되는 표현으로, “이레쯤 걸린다”와 같이 쓸 때 약간 여유 있는 느낌을 줍니다. ‘일주일’보다 부드럽고 정감 있는 말맛을 전하며, 고전 문학이나 한글 성경 등에서는 여전히 자주 등장합니다. 옛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연속이 모여 ‘이레’를 만든다는 인식이 있었고, 그것은 단위가 아닌 삶의 리듬에 가까운 개념이었습니다. 이러한 감성은 한글 고유의 시간 인식 방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달포’ — 정확한 한 달이 아닌, 한 달 남짓의 감각

‘달포’는 한 달보다 조금 더 긴 시간, 약 30~40일 정도를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달포 넘게 기다렸어”라는 표현에서처럼, 정확히 떨어지는 수치가 아닌 흐름과 기다림의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달의 모양, 계절 변화, 작물의 성장 등 다양한 요소로 시간을 가늠했기에, 딱 맞는 숫자보다는 유연한 시간 표현이 필요했습니다. 한글 속 ‘달포’는 바로 그런 사람의 체감과 감정을 담아낸 언어이며, 말 자체에 여유와 애틋함이 녹아 있습니다.

 

 

‘밤 한정’ — 일일 단위의 또 다른 이름

‘밤 한정’은 ‘하룻밤’을 뜻하는 표현으로, 특히 특정한 밤이나 그날의 사건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밤 한정 묵고 갔어”라는 말에는 단순히 ‘하룻밤’을 넘어서, 그 밤이 지닌 정서적 무게와 특별함이 포함됩니다. ‘하루’가 해 뜨고 지는 주간 시간에 중점을 둔다면, ‘밤 한정’은 어둠 속에서 보내는 감각적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한글 속에서 ‘밤 한정’은 밤을 하나의 독립된 시간 단위로 받아들이던 감수성을 반영하며, 민속 문학이나 고전 소설 등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정서로 시간을 재던 한글의 감각

‘이레’, ‘달포’, ‘밤 한정’ 같은 한글 표현은 단순한 시간 단위를 넘어서,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1일’, ‘7일’, ‘30일’이라는 표현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분위기와 삶의 체험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날 밤 한정 내내 잠을 설쳤다”는 표현은, 단순히 잠을 자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간의 무게와 감정을 함께 전합니다. 한글은 시간을 숫자로만 세지 않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흐름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다시 부르는 잊힌 시간의 말들

오늘날 ‘이레’ 대신 ‘일주일’, ‘달포’ 대신 ‘한 달 반’, ‘밤 한정’ 대신 ‘하룻밤’이 주로 쓰이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의 깊이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오래된 말을 다시 불러온다면, 시간에 대한 감각도 함께 되살릴 수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이며, 언어는 그 시간을 가장 인간적으로 붙잡는 도구입니다. ‘이레’, ‘달포’, ‘밤 한정’ 같은 한글 표현은 우리 삶의 리듬과 감정을 다시 음미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잊힌 단어를 다시 쓰는 일은 단어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풍요롭게 이해하는 길입니다.